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재석/활동 내역 (문단 편집) ==== 무명 시절 ==== 상술되어 있듯 유재석의 경력에서 1991년 데뷔 후 약 '''10년간 긴 무명 생활을 했다는 것'''에 관한 이야기는 빠질 수 없다. 지금이야 자타 공인 국내 최고의 톱스타로 손꼽히지만 무명 생활이 상당히 길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신인시절인 90년대 중반 즈음부터 한국 정통 코미디계가 신식 예능에 밀려 사실상 붕괴하는 비극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MC로 전향, 뼈를 깎는 노력 끝에 지금에 이르렀다.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mq&no=4080|이 글]]만 봐도 그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피 나는 노력과 쓴 실패를 많이 겪어왔는지 알 수 있다.[* 이런 게 존재했다는 사실마저 알기 힘든 온갖 프로그램들을 [[이경규]]의 프로그램들에 밀려 말아 먹은 기록이다.] 그나마도 첫 5년 동안은 말이 공채 출신 [[코미디언]]이지 사실상 [[보조출연자]]나 다름없었다. 툭하면 [[심형래]]한테 불려가서 이런저런 영화에 진짜로 보조 출연을 했기 때문. [[무한도전 이산 보조 출연 특집]]에서 공개된 내용에 따르면 무명 시절 사극 보조출연자도 꽤 해봤다고. 초반 나름 유망주의 모습을 보여줬지만 브라운관에선 거의 임팩트를 주지 못 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심각한 '''카메라 울렁증''' 때문에 방송에선 제대로 웃기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PD 등의 높으신 분들을 좀 어려워하던 유재석이 데뷔 초기 '풀뿌리 의사당'이란 코너에서 매우 간단한 역[* 단체장 역을 맡은 김용만의 보좌관 역이었다고 한다. 김용만이 추천해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임에도 몇차례 NG를 되풀이하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500명이 넘는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쫓겨났고''', 그게 그대로 트라우마가 되었던 것이 컸다고 한다.[* 김용만 말로는 NG 사고를 친 이후 관객들이 웅성거리는 시점에서 멘붕이 와서 이미 눈이 풀렸었다고 한다.]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그 사건 당시의 대사를 전부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유재석에겐 안타까웠던 기억인 모양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훗날 [[유 퀴즈 온 더 블럭]] 200회에서 [[김용만]]이 직접 게스트로 출연했을 때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 뒤로 PD 앞에만 서면 덜덜 떠느라 아무리 연습해도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이를 안타까워한 입사 동기 박수홍이 유재석과 함께 코너를 열심히 짰는데, 당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던 박수홍에게만 여성 팬들의 환호가 쏟아지는 바람에 장장 반년에 걸쳐 준비했던 코너를 하지도 못하고 강판을 당하는 사건이 생겼고, 이로 인해 더더욱 슬럼프에 빠졌다. 게다가 동기인 [[김용만]], [[박수홍]], [[김국진]], [[남희석]] 등이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는 모습을 보면서 몇 번이나 개그맨을 관두려고 했다고 한다. 자신은 뜨지 못했다는 열등감 때문에 TV를 보고 있기도 힘들 정도였다고.[* 이 일화는 [[스타 서바이벌 동거동락]] 6번째 탈락자로 유재석이 선정된 직후 나온 '그는 누구인가'에서도 나온다. 다른 프로그램에서 말한 걸 짜깁기한 거 같다.] 한 번은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그 커피숍 알바 자리를 알아봐준 게 대학 동기인 김태균이다.] 김용만과 [[김태균(방송인)|김태균]]의 설득으로 다시 개그를 시작했다고 한다. 한편 세월이 지나면서 이 당시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 오늘날에는, "유재석에게 무명 시절이 있었다고?" 라며 놀라움을 표시하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나온다. 어쨌든 각종 개그 프로그램이나 예능 프로그램에 꾸준히 얼굴을 비추기는 했고, 1993년에는 KBS 코미디대상 신인상 후보에 올랐다거나, 코미디 세상만사에서 유재석의 동기 [[양원경]]이 토크 코너에 게스트로 초대되었을 때, 자기 동기들이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하락세도 없이 계속 유명하다며 살짝 자랑을 한 적이 있었는데, 김미화가 동기가 누구누구인지 물어봤고 듣자마자 '남희석, 김용만, 박수홍, 유재석까지"라고 답했고 김미화도 "역시 공채 7기는 다르네. 모두 스타네.' 라고도 했다.[* 실제로 KBS 개그맨들 중 7기가 가장 오랜 연예활동의 생명을 이어간 사람이 많은 케이스다.] 즉, 아예 방송에 얼굴도 못 내비치는 연예인들에 비하면 인기가 있는 편이 아니었냐는 것이다. 그러나 '''유재석 본인을 시작으로 유재석의 동료 연예인들, 주변의 예능 PD들은 누구 하나도 유재석의 무명 시절이 매우 길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는 사실 표면적인 활동 기록만 보고 느낄 수 있는 착각에 가깝다. 유재석이 여러 프로그램에 꾸준히 얼굴을 비출 수 있었던 것은 유재석 본인이 출연할 수 있을만한 소위 '급'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변 동료들과 PD들이 속된 말로 '''꽂아주었다'''는 게 크기 때문이다. 사석에서 워낙에 웃기는 재능이 넘치고[* 해피투게더에서 박수홍이 밝힌 바에 따르면 유재석이 나이도 어리고 돈도 없으니 같이 밥을 먹어도 계산에서는 빼주고 대신 밥값 몰아주기 사다리타기의 진행을 시켰는데 밥을 못 먹을 정도로 웃겼다고 한다. 슈가맨에 나왔던 군대 동기인 혼성그룹 [[ZAM]]의 황현민에 따르면 방위시절에도 사석에선 정말 웃겼는데 심지어 19금 개그도 자유자재였다고 한다.], 성실하고 착한 유재석을 동료들이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에 꾸준히 불러줬던 것이다. 대표적으로 [[김석윤]] 감독과의 사이에 있었던 일화들을 들 수 있다. 유재석이 당시 개그 프로그램에 출연할 수 있었던 건 김석윤이 어떤 역할이건 유재석을 불러줬던 덕분이고, 김석윤이 연출을 맡지 않으면 유재석은 '''원래 하기로 했던 역할조차 당일 출근길에 강판당할 정도'''로 입지가 위태로웠다.[[https://www.youtube.com/watch?v=DHpoh_JQZ8E|#]] 1997년에 남편은 베짱이 코너를 할 때 조차 송은이를 비롯한 동료들이 다 같이 모여서 유재석의 앞날을 걱정했으며 유재석을 칭찬하는 위장 댓글을 단 적도 있다는 일화도 있다.[[https://www.youtube.com/watch?v=6BcEZ00SKyA|#]] 김석윤이 버라이어티 예능을 시작하면서 [[자유선언 오늘은 토요일]]의 한 코너인 '60년을 이어라'에 유재석을 기용하고 메뚜기 탈을 씌운 이유도, 유재석을 시민들이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지금은 메뚜기 탈을 쓰지 않아도 유재석을 누구나 알아볼 정도니 상전벽해같은 일이다. 1997년 남편은 베짱이에 출연한 시점부터 1999년 토크박스에 출연 하기 전까지의 시기는 사람들이 개그맨인것은 인지하지만 유재석 이름 세글자까진 완전히 각인 시키던 시절은 아니었다. 완전 아무도 모르는 무명 개그맨까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당히 인기얻으며 이름을 알리던 단계까지는 올라가지 못했던 시기였다. 게다가 같은 프로그램에서 '잠을 잊은 그대에게'라는 스튜디오 예능에 유재석이 출연할 수 있었던 것도, 원래 스튜디오에는 유명하지 않으면 부르지 않는데 한 번 불러본 것이라고 언급했다.[[https://www.youtube.com/watch?v=AEgjF1itgY8|#]] [[최진실]]의 추천 덕분에 스타 챔피언이란 목표달성 토요일의 코너를 맡아 괜찮은 반응을 얻었고 이것이 훗날 동거동락의 진행자 자리로 이어졌지만, 동거동락 문서에서도 적혀있듯 기획상으로는 임시직이었던 것을 자리를 맡고 난 후 보여준 활약 덕분에 계속 MC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에 가깝다. [[김영희(PD)|김영희]] PD는 유재석을 이 동거동락도 아니고 그 후의 [[공포의 쿵쿵따]] 즈음에 와서야 차세대 MC감이라고 주목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https://youtu.be/_oRaN3zkv-w|#]] 그 공포의 쿵쿵따 역시 유재석을 각별히 아끼고 밀어준 김석윤 PD가 맡은 프로그램이었다. 이런 입지였으니 제대로 된 수입이 있을 리도 만무해서 서른 살이 될 때까지도 부모님께 용돈을 받았다고 했으며[[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1110141342k|#]] 무한도전 인도 편에서는 20대 후반 당시는 가정 형편도 점점 어려워져서 개그맨을 그만두고 기술을 배워서 취직이나 해야겠다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기였다고 밝힌 적도 있다.[*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해야 한다. 유재석이 20대였던 90년대는 남성의 평균 초혼 연령이 20대 후반이었던 시기로, 그만큼 사람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자리 잡고 가정을 꾸리는 것이 빨랐던 시기다. 30살 넘어서도 결혼 못하면 꽤나 멸시 받던 게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시대에 나이가 서른이 다 되어가도록 자리도 잡지 못하고 용돈을 받으면서 생활했다는 것이 심적으로 굉장히 부담이 심했을 것이다. 남들은 다 결혼하고 빠르면 애도 볼 나이였으니까.] 즉, 유재석이 여러 프로그램에 꾸준히 얼굴을 비춘 것을 가지고 당시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었다고 판단하는 건 이면의 실상을 알지 못하는, 인과관계를 잘못 파악한 것이다. 유재석은 인지도가 있어서 출연이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인지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잠재성을 높이 판단한 동료들이 꾸준히 기회를 줬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를 체감하는 본인과 동료들은 그 기간이 무명이었다고 소회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이 바로 유재석이 국민 MC가 된 후 수많은 신인들과 후배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면서 기회를 주고, 이끌어주게 된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2021년 [[유 퀴즈 온 더 블럭]] 105화, 유재석의 데뷔 30주년 특집에서 스스로 이렇게 언급했다. > 제가 그랬듯이, 한 사람의 관심과 애정이 어떤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겠구나 > 만약에 김석윤 PD님이 저를 버라이어티로 이끌어주지 않았다면.... > 그 한 분이 아니었으면, 그 때 그분의 생각에 함께해주는 제작진이 아니었으면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없었을 수도 있죠. > 신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바로 그런거죠. 때로는...답답해요. 나만 이렇게 방송을 하면 되나? 내 일이 잘 되면 내 역할을 한 건가? > 그렇다고 제가 코미디 프로그램을 만들 순 없잖아요. > 현실적으로는 굉장히 가능성이 희박해요. > 그래도 관심을 갖는 것과, 아예 안된다고 제껴 놓는 건 정말 천지차이거든요.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